나의 하나님 :: 2006/10/27 08:25

저와 친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이른바 "집나온 탕아"입니다.
저는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서 유아세례까지 받은 이른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매주 주일마다 교회를 나갔었고, 이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다 아시다시피 지금 제 자신은 사회적으로 말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누가 제 종교에 대해서 묻는 다면 보통의 경우는 그냥 무교라고 말하지요.

제가 집나온 탕아가 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말 쯤인 걸로 기억합니다. 어릴때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어릴때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여러가지 것들이 나이가 먹어가면서 의문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득이나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저는 (이 때 성격은 지금의 제 셩격과 많이 다릅니다. 다들 믿지 않으시겠지만... ㅡㅡ;) 이런 의문을 적극적으로 풀기보다는 교회에 나가기 귀찮다는 핑계과 곧 고3이 되니 학업에 전념하겠다는 변명으로 교회를 안나가기 시작했지요...

이 때 제가 가지게 되었던 기독교에 대한 의문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잘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기억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 다는 것이 기독교의 큰 맥락중에 하나인데, 그렇다면 아프리카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 혹은 기독교가 전세계로 퍼지기 전에 살았었던 모든 인류는 아예 하느님과 예수님을 접할 기회가 없는 데 이 사람들은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냐? 그리고  기독교를 믿지 않더라도 평생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고 사는 사람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면, 이 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뭐..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  개인에 있어서 그 사람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 가는 그 사람의 가치관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이런 증거는 저 위에 아무 생각도 없이 쓴 주일이라는 단어에서도 찾아 볼 수 있겠지요. 왜 일요일이라고 쓰지 않았을까요....? 어찌되었건 제 안의 종교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태신앙으로서의 기독교는 제 가치관을 이루는 큰 축을 이루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인지 지금도 종교라는 주제는 저가 굉장히 흥미있어하며 토론하고 싶어하는 주제입니다. 게다가 이상하게 여지껏 제 인생사에서 제 주변에 친한 사람들은 이상하게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꼭 한두명씩 있더군요... ㅡㅡ;;;;; 덕분에 이래저래 여지껏 10여년 넘게 종교에 대한 토의를 지속적으로 해올 수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점차 내안의 하나님을 점차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즉, 앞서 제가 기독교에 대해 들었던 의문에 대해 내 자신이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는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데, 그 것은 내가 생각해 오던 내안의 하나님이 나만이 아닌 다른이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첫번째 기회는 대략 5년 전의 류상태 목사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감동스러우면서도 그 상황자체가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사석에서 여러번 이야기한적이 있어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오늘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니까요. 어쨋든 그 때 류목사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나만의 생각이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그게 다였던 것이죠. 그 이후로 내 삶의 뱡향을 얻지는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또 한번 기회가 온 것 같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알고 있으시리라고 생각되는 gyhang.net에서 입니다. 과거에도 우연히 인터넷에서 기독교 관련한 글을 읽다가 찾아가게 되었던 곳인데, 이 당시만 해도 저의 무지로 김규항님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우연히 찾아가게 된 이 곳에서 이번에는 좀 더 진지하게 많은 글을 찾아 보게 되었고 그 와중에 제가 읽게 된 많은 글들에서 제가 그동안 가져왔던 의문에 대해서 제자신이 만들어낸 답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민해왔던 앞으로 제 삶의 방향에 대한 무언가도 얻은 듯합니다.

gyhang.net에서 김규항님의 많은 좋은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한 구절을 옮겨 보겠습니다.

개신교에선 ‘하나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유일한 신이라는 말인데, 나는 오히려 그 말이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가 하느님을독점하려는 욕망으로 읽힙니다. 예수 당시 성전 체제가 신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하고(신이 성전 지성소에 산다는 전제에서) 온갖악행을 저질렀던 걸 우리는 배웠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문제와 싸우다 죽임을 당했지요. 그런데 오늘 교회가 바로 예수 당시의성전체제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엔 하느님을 섬기려는 게 아니라 독점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배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온우주의 주인이라면 교회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교회체제가 없는 곳은 하느님이 없는 곳이되는데 제국주의 침략사에서 실제로 그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백인과 같이 하느님이 만든 인간으로 보는가 아니면짐승으로 보는가, 였지요.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과 소통해왔다고 주장하는 극소수의 성직자들은 ‘매국노’로몰렸습니다. 그 논쟁은 실은 ‘국익’ 논쟁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만나왔습니다.예수는 종교체제의 굴레에 갇힌 하느님을 구출하여 인민과 직접 만나게 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환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죽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 역시 하느님의 딸 아들들입니다.예수가 전태일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보지요. “너는 나를 창시자로 하는 기독교의 구원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또 자살이라는죄를 지었기에, 나와 같은 맥락의 실천을 했지만 지옥에 가야 한다” 예수가 그럴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그런 예수를 믿으면 될것입니다. 나로선 그런 예수는 개자식입니다.


우선은 그동안 무작정 광야를 헤매이던 탕아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정표를 얻은 듯한 기분입니다. 그 이정표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모르고 있지만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과연 이 길을 잘 쫓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그 길을 끝까지 쫓아가지 못했을 때에 제 자신에게 실망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제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를 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겠지요.


2006/10/27 08:25 2006/10/2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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